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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력으로 암 이기는 시대 멀지 않았다

관리자 2019.11.04

면역력으로 암 이기는 시대 멀지 않았다


[책과 길]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찰스 그레이버 지음, 강병철 옮김/김영사, 448쪽, 1만9800원

 

T세포는 면역계에서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항원을 살해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은 T세포(빨간색)가 암세포(흰색)를 공격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컬러 주사와 현미경을 사용해 미국 국립암연구소가 촬영했다. 김영사 제공


2011년 퓰리처상을 받은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 제목을 그대로 빌리자면 암은 “만병의 황제”다. 특히 한국에서 암은 끔찍할 정도로 힘이 세다. 통계청이 한국인의 사망원인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83년 이후 언제나 한국인의 사망원인 1위는 암이었다. 지난해엔 암으로 인한 사망자가 역대 가장 많은 7만9153명에 달했다. 각각 사망원인 2~4위를 기록한 심장질환 폐렴 뇌혈관질환 사망자를 합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숫자엔 미치지 못했다.

암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625년 이집트 의사가 유방암을 묘사한 파피루스 두루마리다. 이 두루마리의 ‘치료법’ 항목엔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무려 4644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암을 잘 모른다. 암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킬러처럼 습격해 우리네 삶을 결딴내버리는 공포의 대상이다.


암을 정복할 수 있을까

거두절미하고 서문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암은 살아 있다”로 시작하는 글에는 섬뜩한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약물은 일시적으로 암세포들을 독살하거나 굶겨 죽일 수 있지만, 일단 공격을 견디고 살아남은 암세포는 계속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약물이 암의 리듬에 맞춰 춤추기 시작하는 순간, 암세포는 스텝을 바꿔 멀어져 간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다음부터다. 미국의 의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우리 몸속에는 암살자들이 있다”면서, 이들 암살자 이름이 ‘면역계’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면역계는 암을 정복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마침내 우리는 그 도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아냈다”고 강조한다.

이쯤 되면 이런저런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암을 그동안 치료하기 힘들었던 건 암세포를 상대로 인간의 면역계가 별무소용이었기 때문 아니던가. 그런데 저자는 무슨 까닭에서 인간의 면역계가 암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요술봉이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일까.

알려졌다시피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암 치료법은 크게 세 가지다. 암세포를 자르거나(수술), 태우거나(방사선요법), 약으로 죽이는(화학요법) 게 전부다. 이들 방법을 통해 환자의 절반 정도는 완치 판정을 받는다. 놀라운 성과라고 치켜세울 수 있지만 바꿔 말하자면 암에 걸린 절반은 비명에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최선의 도구”라고 떠받드는 면역계를 활용한 치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면역계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면역계는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모두 설명할 순 없으니 상대적으로 중요한 후자만 얘기하자면 후천성 면역계는 B세포와 T세포로 나뉜다. B세포는 혈류를 타고 돌아다니며 마주한 적 없던 항원(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기생충 등)을 만나면 자기복제를 통해 엄청난 수의 세포를 만들어 공격을 퍼붓는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로 악당들을 꽁꽁 묶어놓았다가 나중에 처리하는 것”처럼 항원을 완전히 감싸버린다.

한데 암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B세포보다는 T세포다. T세포는 “이질적인 항원을 인식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그 세포를 죽여 버리는” 세포다. 문제는 T세포가 그동안 암을 상대로 속수무책 백전백패했다는 점이다. 암세포의 등장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학자들은 암세포가 정상세포와 너무 비슷해 T세포가 인식하지 못한 거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 의학계에서는 페니실린의 등장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면역관문 억제제’의 탄생이다. 면역관문은 T세포 표면에 자연이 만들어놓은 내장형 스위치다. 세포 살상 기계인 T세포가 난폭해지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학자들은 암세포가 이 같은 면역관문을 악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암세포는 인체에 자리를 잡으면서 면역계에 “공격하지 마”라는 뉘앙스로 면역관문에서 면역계를 상대로 은밀한 악수를 건넨다.

면역관문 억제제는 암세포가 손을 내미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는 약이다. 면역관문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것. 책에 담긴 비유를 그대로 옮기자면 “자물쇠에 열쇠를 꽂은 후 손으로 잡는 부분” 자체를 부러뜨려놓는 게 이 약의 역할이다. 즉, 면역요법은 암세포를 공격해 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저마다 타고난 면역계를 활용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게임의 규칙을 바꿔놓는,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일거에 바꿔버리는 요법이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밝혀낸 학자 중 하나인 미국의 제임스 엘리슨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현재 면역요법으로 치료받는 환자는 50만명이 넘고 임상 단계를 밟고 있는 신약은 1000여종에 달한다.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항암 치료 분야의 중요한 진보는 대략 50년 단위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항암면역요법은 눈 깜짝할 새에 한 세대를 건너뛴 것처럼 보일 정도다.”

현대의학의 ‘현재’를 만나다

여기까지 읽으면 드디어 인류가 암을 정복하게 됐구나 반색하게 되는데, 상황은 기대만큼 녹록지 않다. 저자는 “헛된 희망이 잔인한 것처럼, 과장된 선전은 위험하다”고 썼다. 예컨대 현재 쓸 수 있는 관련 약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면역관문 억제제에 반응하는 환자도 전체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용도 문제다. 미국에서 이 요법을 활용한 치료를 받으려면 1억원 넘게 필요하다. 저자는 “의학적 발전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없다면 아무리 혁신적인 치료가 개발된다고 해도 인류 전체로서는 퇴보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면역 요법이 실금 같은 희망의 빛을 제시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의학계의 어제 오늘 내일을 두루 살피게 해준다는 점이다. 과거 면역요법 발전에 투신한 의사들은 하나같이 멸시의 시선을 받았다. 이들 의사는 암 환자를 상대로 다른 균을 투입해 면역계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이를 통해 환자를 완치시키곤 했다. 하지만 인정을 받진 못했다. 그동안 면역요법을 향한 야멸찬 평가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의학계의 막장” “헛된 약속과 효과 없는 백신들이 난무했던 옛 시대의 사악한 유물” “윤리적으로 위험천만한 일” “정신 나간 과학자들의 광기” “면밀한 추적 관찰 절차가 없는 인체 실험”….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저자는 상전벽해에 견줄 만한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의학계 풍경을 세세하게 그려내는데, 필력이 보통이 아니다.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는 제목을 보고 어려울 거로 생각하기 쉬운데 겁먹지는 마시길. 가독성이 상당한 신간이다. 촌철살인의 비유가 일품이고 번역도 매끈하다. 의학 분야에서 이 정도의 교양서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을 마주할 독자들은 암이 “만병의 황제” 자리에서 내려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케 될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5453&code=13150000&cp=nv